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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한성백제박물관

by 쫑쌤 2024.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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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는 올림픽 공원! 올림픽 공원 안에 있는 몽촌토성 둘레길을 산책하면서 봄을 느꼈다.

 

올림픽공원 안에는 체육관련 기관 및 시설이 많은 반면에 몽촌토성이 있기 때문에 역사편찬위원회 등 역사관련 기관도 많다. 그 중 한성백제박물관에 다녀왔다.

 

한성백제 박물관의 건물은 특이하게 생겼는데, 백제의 토성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관람시간 평일 9:00~19:00 [매주 월요일, 1월 1일 휴관]

전시해설 : 10시, 11시, 14시, 15시 [별도 예약 필요없음]

 

박물관은 지하 1층에서부터 시작한다. 지하 1층에는 선사시대와 관련된 내용이다.

아시아인의 조상은 약 6~7만년 전 아프리카 동부에서 출발해 인도 북부를 지나 남아시아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은 약 4~5만년 전 남아시아에서 다시 두 갈래로 이동하여 북방계 기마인과 남방계의 농경인으로 나뉘었다. 한강유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구석기시대는 인류의 역사 중 99%를 차지한다. 불을 발견하였고, 주로 채집과 사냥을 통해 먹을거리를 마련했으며 이동하면서 동굴에 살거나 들판에 막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빙하기가 끝나고 사람들은 한 곳에 머물며 농사를 짓고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를 신석기문화라고 한다.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물가에서 움집을 만들어 마을을 이루었고, 간석기를 썼으며,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잡이를 하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서울의 암사동 유적이 이 시기의 유적을 다루었다.

 

기원전 3500년 무렵 사람들은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다양한 무기와 거울, 도구를 만들었다. 이런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고조선이 출현했다.

 

청동기 시대에 4대 문명이 출현했고,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 철기시대에 기원전 중국에서는 한나라를 건국했고, 이후 신라, 고구려, 백제가 탄생한다. 철기의 보급으로 정복전쟁이 더욱 활발해지고 농업생산력도 증가하였다.

 

박물관 1층부터는 백제와 관련된 전시가 이어졌다.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678년간 백제국이 있었다. 백제는 한성[기원전 18~ 기원후 475], 웅진[475~538], 사비[538~660]순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한성은 지금의 서울이고, 웅진은 지금의 공주, 사비는 지금의 익산이다. 특히 1971년에  공주에서는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다. 무령왕릉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예술품이나 백제의 국제무역수준은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다 11시 즈음 해설을 듣기 위해 찾아갔다.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다 문득 든 생각은 '왜 몽촌토성이 있는 데에 올림픽공원을 세웠지?' 그도 그럴게 몽촌토성은 백제의 성터니까 300~400년대의 건물이고, 올림픽공원은 88올림픽 공원이후에 세워진 것일테니까.

 

1970년도에 잠실도[잠실이 예전에는 섬이었다]를 매립할 때 몽촌토성을 헐어 준설토로 사용하려고 했다. 이 당시의 몽촌토성은 백제의 위례성이라는 게 밝혀지지 않아서 그냥 동네 주민들한테는 능선이라고 불리는 언덕이었는데, 여기가 백제의 위례성일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나오면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1981년에 88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됨에 따라 이 일대가 올림픽공원 부지에 포함되었다. 올림픽공원은 올림픽 경기에 사용할 경기장 건설을 골자로 지어지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주민들은 모두 이주하게 되었다. 공사가 1984년에 시작되었는데, 공사 도중 현장에서 백제 때 초기의 토성인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한때 공사가 중단되어 늦춰졌다가 몽촌토성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토성과 공원을 한 자리에 존치하기로 결정되었다.

 

몽촌토성은 1982년도에 국가 사적 제297호로 지정되었고, 본격적인 조사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이루어졌다. 88올림픽 덕분에 몽촌토성의 유물이 발견되어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벼루·접시 등의 중국 청자와 동전문양이 새겨진 전문도기, 금동제 허리띠장식 등의 출토는 몽촌토성이 백제 한성기의 왕성일 가능성을 제기하게끔 하였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1145년에 완성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하남위례성을 건국하였으며,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왕도 한성이 함락될 때가지 왕조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1997년이었다. 평소 풍납토성의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서 수많은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 한 번의 조사로 몽촌토성에서 나왔던 유물보다 많은 유물이 쏟아지자 정부는 서둘러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긴급 조사에 들어가게 된다. 정부는 조금씩 풍납동 땅을 매입해서 건물들을 철거했고 그 결과 풍납토성이 왕성일 것으로 추측되는 수많은 부장품들이 발굴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8년 백제 시조 온조왕이 최초로 하북위례성을 쌓았고, 이후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백제 초기 기록은 신뢰도가 많이 떨어져서 고고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몽촌토성, 풍납토성이 위례성으로 유력하게 꼽힌다.

 

 

 

한성백제박물관의 로고는 풍납토성의 모양 안에 칠지도가 있는 모양이다.

 

유물을 살펴보다 나막신이 보였다. 어, 근데 일본에서 기모노에 신었던 신발이다! 일본의 전통신발이 백제시대의 신발이기도 했다. 그만큼 백제가 일본전통문화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백제는 동아시아 해상 무역권을 장악한 4세기 후반부터 왜와 본격적으로 교류하였다. 근초고왕 대에는 왜왕에게 칠지도를 보냈고, 왕이박사는 유교와 한자 등의 학문과 각종 기술을 전하였다.

 

 

백제는 고유의 토착 신앙 위에 유교, 도교, 불교 등 외부에서 전래된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유교과 도교의 대한 이해는 한자의 보급과도 관련된다.

한편 바둑과 주사위 놀이가 유행했는데, 특히 바둑은 왕실과 귀족들이 주로 즐겼다고 한다. 아래 유물은 사진보다 직접 보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

 

 

아무래도 선사시대 유적들이다 보니 해설이 없이 전시만 봤을 때는 흥미롭지 않았을 것 같다. 해설을 들으니 백제의 역사, 백제박물관의 숨겨진 이야기 등을 들을 수 있어서 즐거왔다. 다음에 간다면 또 해설을 들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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