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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by 쫑쌤 2024.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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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역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관람시간 : 09:30~18:00

정기휴관 :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날

관람료 : 3000원

해설 : 아래의 사이트에서 신청할 수 있고, 보통 한국어 해설은 10시, 14시 15시가 있다.

해설은 적극추천한다. 2시간동안 진행되었는데 열정넘친 해설가님의 설명에 배우는 게 많은 해설이었다.

https://sphh.sscmc.or.kr/reservation/docent.php

 

 

4월, 5월, 6월에는 학생들의 체험학습, 수학여행으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는 인원이 굉장히 많았다. 학교마다 미션지를 나눠줘서 성실하게 참여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서대문 형무소는 1908년에 일제가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애국시민 등이 투옥되었다. 이후 4.19, 5.16 등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그렇게 1987년을 끝으로 옥사 운영을 마쳤다.

 

 

수감자의 생활공간은 주로 감방과 공장이었다. 운동시간은 아주 짧았고, 서신은 한 달에 한번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3제곱미터의 작은 방에 20~30명을 수용해서 수감자들이 누워서 잡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게다가 별도의 화장실이 없고, 채광과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매우 비위생적이고 열악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일제의 정신교육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등급을 매겨 식사도 차등지급하였다. 등급별로 깊이가 다른 원통형의 틀에 밥을 찍어 배급하였다. 이 때 밥은 콩, 좁쌀, 현미로 이루어진 밥이어서, 콩밥의 유래가 바로 이 밥이다.

 

서대문형무소는 공장에서는 직물 생산이 이루어졌고, 수인복도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수인복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같은 옷이었다. 그래서 옥바라지를 하고 있는 가족들이 솜옷을 만들어 감옥 안으로 영치하기도 하였다.

 

형무소의 일부분인 빨간 벽돌도 마포에 있었던 형무소의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벽돌 위 동그란 문양 가운에 경성의 경이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은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었덕 장소로, 여성 미결수를 가뒀던 구치감이다.

 

수많은 열사들이 갇혀있었지만, 수감기록카드가 남아있는 것은 그 중 1/10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감자들이 햇볕을 쬐거나 간단한 운동을 했던 운동장이다. 운동할 때 대화하거나 도주하는 것을 막으려고 격벽을 세워 수감자들을 분리하고 감시했다. 전형적인 원형감옥구조(파놉티콘)로 만들어졌다.

 

1987년 까지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던 건물로 사형장이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다들 한 마디씩 남길 것이다. 그 중 강우규 의사는 '절명시'를 남겼다. 죽는 순간까지 나라 없음에 한탄한 모습에 독립의사의 마음에 존경을 넘어 경외로움이 느껴졌다.

 

사형장 옆에는 시구문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사형 집행 후 시신을 바깥의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밖으로 연결한 통로이다. 원래 길이는 200m인데 40m길이로 복원하였다.

 

서대문 형무소는 1908년부터 1987년까지 80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1908년 문을 연 경성감옥은 처음에는 의병들이 투옥되었다. 

 

1895년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고 나서, 단발령이 시행되자 전국의 의병들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을미의병이다.

1905년에는 을사오적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서울에는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 및 정치에 적극 개입하였다. 이에 2차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한 움직임. 미록 실패했지만, 33살 청년의 용감한 투쟁이었다.

 

 

1907년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고종이 강제퇴위되고, 군대는 강제해산되었다. 이에 3차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많은 의병들이 투옥되었고, 이 의병들의 대부분 만주지역이나 북간도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지속했다.

 

서대문형무소의 메인 전시관은 보안과청사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3년 건축되어 지금까지 유지된 건물이다. 전시실에 입장하면,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의 역사를 지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소개한다.

 

 

왜 하필 서대문 형무소는 서대문 근처에 지었을까? 서대문 형무소는 독립문역에 위치해 있다. 독립문 전에는 영은문이 있었다. 영은문은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였던 장소였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자, 서재필의 감독아래 청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독립문이 영은문 자리에 세워지게 된다. 일본은 그 옆에 감옥을 설치함으로써 한국인의 자주정신을 통제하고 싶어했다.

 

2층 전시실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상범의 수형기록카드가 이름순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강우규, 안창호, 유관순, 한용운 등을 찾을 수 있다.

 

도산 안창호는 서대문 형무소에 세번이나 투옥되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진행함에 있어서 많은 고생을 하고, 수척해진 모습이 마음이 아프다.

 

지하1층에는 고문실이 있었다. 구십여가지의 각종 고문기술의 독립투사들의 죄를 묻고, 인정하게 했다. 그 과정이 너무 참혹해서 해설을 들을 때 소름이 너무 돋아 들을 수가 없었다.

 

광복 이후 서대문 형무소는 좌우익의 이념 문제와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 정치 사회적 문제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고, 여기에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이렇게 미래의 우리나라와 우리를 위해 자신들의 현실을 희생하신 독립투사에게 감사함을 느끼다. 그 후손들의 지금도 행복하기를 소망해본다.

 

 

2024.05.30 - [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 서대문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 기념관 주변에는 독립문이 있는 서대문 독립공원이 있고, 맞은편에는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이 있다.  운영시간 : 화요일~토요일 10:00~18:00휴관일 : 월요일, 일요일,

limchung90.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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