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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by 쫑쌤 202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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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광화문광장을 바라보면 왼쪽에 크게 곡선형의 대형 화면이 띄워져 있는 건물이 있다. 종종 미디어아트도 상영된다. 바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다. 일제강점기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장소이다. 미국대사관 옆에 있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보통의 박물관이 월요일에는 휴관하는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은 신정, 추석당일, 설날당일을 제외하고 개관한다. 개관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5층 역사관이 메인이고, 1층은 로비, 3층은 기증관, 4층은 체험전시관으로 운영된다. 전체해설 혹은 테마해설이 있어서 별도예약없이 현장에서 바로 진행된다. 나는 오후 2시에 국경일과 기념일을 주제로 해설을 들었다.

 

1.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 - 근대 국사 수립을 위한 노력과 좌절,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저항, 그리고 새로운 문화와 교육의 경험으로 변화해 가는 사람의 삶.

 

조선은 문호개방 이후 자주독립의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1890년대 각계각층의 세력들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열강의 침탈을 맞서고자 하였다. 농민들은 기존 조선 양반 관리, 사회 혼란에 대해 1894년부터 동학농민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걸어 끌어들여 능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을 만들었으나, 1904년 대한제국의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무력전쟁으로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렇게 한국은 전쟁터가 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를 겪었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의 통치의 성격에 3기로 나눈다. 1기 무단통치[1910-1919] 때는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이 실시되었고, 일본의 헌병들이 치안 업무에 투입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이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곧이어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2기 문화통치[1920-1930] 때는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통치의 안정을 위해 제한적으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억압보다 회유책으로 많은 친일파들이 양상되었고, 민족은 분열되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한글과 한국사 연구를 힘겹게 이어갔다. 3기 민족말살통치[1931-1945] 때는 일본이 중일전쟁의 준비 및 실행으로 한국은 국가총동원법이 실시되어 병참기지화 되었다.

 

1943년이 넘어가서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게 되었다. 연합국에서는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을 적적한 시기에 자유롭게 독립된 상태로 만들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2. 평화, 민주, 번영을 향하여 - 광복이후 정부수립 과정과 6.25전쟁, 고단했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잘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민주적적인 사회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합의하에 북위 38도선을 분계선으로 분할되어 미국과 소련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모두들 이러한 신탁통치에 대해 반대하고 하루빨리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고 싶었으나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김일성의 반대 등의 이유로 통일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다. 유엔의 감시아래 남한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구성되어 헌법을 제정하였고[1948년 7월 17일], 1948년 8월 15일에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전세계의 냉전 체제 속에서 한국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고 만다. 북한은 소련의 승인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국민은 이에 대항 4.19혁명으로 민주주의를 지켰다.

하지만 또 1년 뒤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민주주의의 시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군부세력은 민주적 헌정을 중단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대한민국은 1970년대에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것은 정부 주도의 성장정책, 기업의 투자와 노동자의 근면, 그리고 국민들의 협조가 조화를 이룬 성과였다. 재빠른 성장에는 큰 아픔도 동반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통하여 독재를 강화하였다. 이에 대항한 국민의 저항도 거세졌고, 결국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체제는 끝났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1980년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집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전두환 정부는 사회정화 사업과 국가 안전기획부를 통해 사회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억압은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적으로 이어졌고, 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뭉쳤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시작으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정치인, 학생, 사회운동가들은 전두환 정부에 맞섰다. 게다가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1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를 참여하였다. 6월 민주항쟁은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의 이정표를 세웠다. 드디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국민기본권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가 확고히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전시관 8층 야외정원에서는 경복궁, 청와대가 한 눈에 보인다.

 

3. 나-대한민국-세계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하던 호황의 시대를 보냈다. 호황과 민주화가 가져온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는 대중 소비의 시대를 열었다. 88올림픽을 전후하여 세계화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여행이 가능해졌고, 금융과 자본시장이 개방되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한국사회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감내해야 했다. 과도한 해외의 빚에 의존해 몸집을 불리던 재벌들이 연쇄 도산하면서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가 확대되었고,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가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3층의 전시를 다 보고, 4층 전시실에서는 세대 소통을 주제로 여러 세대의 그때 그 시절을 구현했다. 체험형 전시여서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었다.

 

전시를 다 본 후, 너무 힘들었던 지난 100년간의 한국의 역사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고비를 넘어가면 다른 한고비가 나오고... 90년생인 나는 겪어보지 못했던 사회의 부조리함에 마음아프고, 이것을 결국 극복했던 우리나라의 힘에 감동을 받았다. 부모님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IMF시대에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던 나, 부모님은 6.25전쟁 이후 태어나 얼마나 불합리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을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제의 억압 속에 어떻게 견디었을까. 우리나라 역사에 맘 아팠지만 한편으로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자부심이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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