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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서울역사박물관

by 쫑쌤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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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을 다녀왔다. 조선시대 때 한양[별칭으로 한성]박무으로 수도를 천도하고,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이 되었다가 광복 후 서울이 되는 과정과 역사, 문화를 전시한 공간이었다.

 

관람시간 : 09:00 ~ 18:00, 1월1일,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 무료

전시해설 : 11:00, 14:00, 15:00

 

상설전시실이 박물관 3층에 있어서 3층부터 관람하며 내려왔다. 상설전시는 주제에 따라 4개의 전시실로 운영된다. 1전시실은 조선시대의 서울, 2전시실은 개항과 대한제국기의 서울, 3전시실은 일제강점기의 서울, 4전시실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주제로 한다.

 

1전시실. 조선시대의 서울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는 한양을 왕도로 정하면서 종묘 사직과 궁궐을 세우고 도성을 축조하였다. 천도를 결정한 지 1년 만에 종묘와 새 궁궐인 경복궁이 완공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창덕궁을 새로이 완공하였다. 세종 때 유교개념이 완전히 정착되고, 국력도 강화되면서 한양도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이다.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조선의 위용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크게 그렸다.

 

당시 천체를 나타내기 위한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석판 위에 새겨진 것이 진짜이고, 이것은 탁본이다. 이 천문도는 경이로울 정도의 정밀도를 자랑하며 만들어졌던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 300년간 만들어진 천문도를 통틀어도 독보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한양은 유교적 도시계획의 기본 원칙에 입각해 계획되었으며, 궁궐, 종묘, 사직, 관청거리를 조성한 후, 국가 경영의 핵심 관청들을 광화문 앞으로 배치하여 육조거리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7]으로 한양의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다. 선조부터 광해군 대까지는 불타없어진 모든 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종묘를 비롯한 주요 시설이 재정비되었고 성곽도 보수되었다. 불 탄 곳 위에 흙을 덮은 후 다시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조선초기의 유물들이 더 깊은 땅 속에서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아래 사진은 불 탄 대문의 일부분이다.

 

한양은 도성을 기준으로 도성 안과 도성 밖 지역으로 나뉘었다. 도성 안은 북촌, 서촌, 중촌, 동촌, 남촌, 아랫대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각 지역은 특색이 달랐다. 북촌에는 부유한 권문세가들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부촌이었다. 서촌은 왕족과 권력층의 주거지였다. 동촌에는 성균관이 위치해있어서 교육특구였다. 반면 남촌은 권력에서 소외된 선비들이 살던 지역이고, 중촌은 기술직이나 상인이 주로 거주했던 지역이다.

 

조선 전기 한양은 왕과 고위 관료 등이 주로 거주하는 왕도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는 대동법 실시, 금속화폐 유통 등으로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여 한양은 상업도시로 변모하였다. 도성 밖 성저십리는 지방에서 상경하여 상업에 종사하고, 마포, 용산, 서강 등지는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과 상품들이 몰려들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한양은 전국의 길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조선의 가장 위의 경흥까지의 길과 가장 밑인 해남까지의 길의 합이 삼천리이므로 우리나라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2전시실. 개항과 대한제국기의 서울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에 대항하여 프랑스 군함이 한강을 통해 마포로 들어왔던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의 시작이었다. 조선은 식민지화를 위한 압력에 대항하여 자주적 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는 와중에 조선의 전통과 서양의 근대가 공존하게 되었고, 생활의 모든 면이 격변하기 시작해였다. 서울에는 서양식 건물이 늘어났고, 전기, 석유, 성냥, 유리 등 새로운 문물들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일본과 중국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경험을 참고하여 조선도 이를 배우려 하였다. 그래서 조선은 미국, 러시아, 영국 등의 열강과 통상 관계를 확대하였다. 1880년대 중반부터 외국인 거류지가 생겨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늘었다. 일본인은 남산 복쪽 기슭에, 청국인은 서소문과 북창동 및 청계천 주변에, 서양인은 정동 주변에 모여 살게 되었다.

 

개혁에 반대하거나 개혁에 찬성하면서도 그 속도와 방식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이 의견 대립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폭발하였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었다. 더불어 서울을 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개조되기 시작했다. 1880년대부터 각국 공사관과 신식 학교, 종교 시설이 모여 있던 정동은 서울의 새 중심지가 되었다.

 

3전시실. 일제강점기의 서울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서울은 경기도 소속의 경성부로 격하되었다. 서울에는 식민통치를 위한 주요 기관들이 건설되었고 1926년에는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가 지어졌다. 차별적 도시계획으로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과 한국인 거주지인 북촌의 생활상은 엄청나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1920년대 문화통치의 시대에 경성은 다양한 대중문화가 나타났다. 백화점, 극장, 다방, 카페 등이 식민지 상권인 종로 등은 경성의 유행을 생산하고 유행이 신상품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때 모던보이, 모던걸이 출현했다.

 

 

4전시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서울은 미군정기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수도가 되었지만 1950년 6.25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국가주도적 경제개발과 더불어 서울은 급격히 현대화된 거대도시로 변모해갔다. 도시인구 증가에 따라 시가지는 한강 이남으로 크게 확대되었고, 시내 전역에서 도로, 상하수도, 지하철, 주택, 학교 등의 건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70년대에는 여의도, 강남 그리고 잠실까지 시가지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결실이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도시빈민은 달동네에 모여 살았고, 이후 강제 철거나 집단 이주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노동운동과 도시빈민운동, 인권운동 성장의 배경이 되었다.

 

야외에는 예전에 광화문을 시멘트를 사용하여 복원하였을 때의 부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영상전시실이 잘 되어 있어서 인상적이게 관람하였다. 무엇보다 중간중간에 쉴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많은 서재 느낌의 공간이 상설전시실 위에 마련되어 있어서 너무 좋았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분관들도 많이 있다. 한양도성박물관, 청계천박물관, 동대문역사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경교장, 백인제가옥, 경희궁,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돈의문역사관, 딜쿠샤 등이다. 정말이지 박물관의 세계도 참 무궁무진하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서울, 서울의 역사를 보면 한국과 조선의 역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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