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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by 쫑쌤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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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에 왔다가 근처에 못보던 기념관이 하나 생긴것을 확인했다. 바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었다. 2022년 3월 1일에 개관하였다 한다. 맞은 편에 서대문 독립공원이 있으니, 그 위치와 개관날짜 모두 특별한 곳이었다.

 

 

관람시간 : 10:00 ~ 18:00 [월요일, 1월 1일, 설날 당일, 추석 당일 제외]

해설시간 : 11:00, 14:00, 15:00[특별전시], 16:00

 

 

1층 야외 전시실에는 안내책자에도 소개된 거대한 야외작품이 있었다. 작품명 '역사의 파도'. 이 작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고 일제에게 강탈된 주권과 국토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선일들의 고귀한 독립정신과 광복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향후 계속될 미래 대한민국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가운데에 태극문양이 빛나고 있다.

 

 

해설을 들으면서도, 듣고나서 다시 전시를 돌아보면서도 중간중간 울컥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용기와 희생에 감동받았다.

 

 

상설전시는 2층부터 시작한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한일병합 후,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그 후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2층 전시물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구슬의 움직임을 이용한 키네틱 아트였다. 왕의 나라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민의 나라 대한민국이 세워졌음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이 작품에 사용된 2백여 개의 구슬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던 2백여 만 명의 한민족을 상징한다. 3.1운동이 물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이어짐으로써 대한민국이 한 사람의 힘이 아닌 수많은 국민들의 힘으로 이룩된 것임을 보여준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의 침략 의도가 노골적이게 드러나자 전국 각지에서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났다. 의병들은 무장 투쟁으로, 계몽운동가들은 신교육과 민족자본 육성으로 나라를 지키게 되었다. 1910년대 들어서자 국권회복운동은 국내 비밀결사의 조직과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로 이어졌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 대도시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전국으로, 국외 한인 사회로까지 퍼져나갔다.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서 또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1919년 4월 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집에 국내외 곳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29명이 모였다. 이들은 나라를 새로 세우고, 그 이름을 정했다. 대한제국을 잇는다는 뜻에서 대한을, 그러나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민국을 합쳐 대한민국이라 하였다. 이 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의회가 되었다.

 

국내에는 조선총독부가, 중국과 러시아에는 일본영사관이 설치되어 있어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 등 혁명정신을 중시하여 자신의 조계에서 펼쳐지는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다.

이 건물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표현하였는데, 지금은 이 건물이 없어졌다고 한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 건물을 모티브로 전시장 안쪽으로는 임시정부 내부처럼 꾸며놓고, 임시정부가 했었던 일들에 대하여 전시해 놓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광복의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군사적으로는 만주지역 독립군과 손잡고 독립전쟁을 펼쳤고,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이 한국광복군이 지금의 국군 창설의 기틀이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힘쓴 결과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대한민국은 여성의 참정권이 1919년에 세계적으로 빠르게 도입되었다. 여성들도 빠르게 독립운동단체를 만들었고, 임시정부에서도 여성의원으로 선출되기 하였으며, 독립군으로서도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실 군대양성과 전쟁참여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1920년대에 들어 적은 인력으로 침략 세력을 공격하는 의열투쟁을 선택하게 되었다. 한인애국단 등이 바로 그러한 조직이다. 한인애국단은 김구가 설립한 조직이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봉창 의거와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가 대표적인 거사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27년간 독립운동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를 지원한 수많은 국내외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내외 동포들은 비밀리에 지원 단체를 결성해 군자금을 모금해 보냈다.

 

이 태극기는 미주 동포들에게 한국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부탁하는 김구의 친필이 적혀있다. 이것은 안창호에게 전달되었다.

 

3층 전시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사람들에 관한 영상도 볼 수 있는데, 엄청 큰 대형화면에 압도당했다.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를 통해 일왕이 대한민국 독립을 선언하였고, 9월 1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대한 항복선언을 공식적으로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귀국 후 정부 수립을 계획했다. 국내외 상황을 복잡하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국제신탁통치가 시작되었다. 임시정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지만, 미군정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여러 정치 세력들은 정부 수립 방략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다. 국제연합에서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자,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의회가 구성된 후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되었고, 그 결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혼란한 시기에 각 관청에서 일하던 높고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그대로 일하다보니, 친일파들의 숙청이 제대로 되지 못한것이 아쉽다. 또한 이들이 만들어 놓은 논리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준 것은 없을까? 독립운동가들은 제대로 보상을 받았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해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시했다.

 

1987년 현행 헌법 개정안은 3.1운동을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했다.

 

5층에서는 서대문 역사공원이 한 눈에 보인다.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서 개인의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안정된 국가가 나를 지탱해 주어야 한다. 지금의 삶의 토대가 내가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애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애국심을 고양시켜, 나도 크게는 나라, 적게는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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