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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용산역사박물관

by 쫑쌤 202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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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고향에 내려가려면 호남선을 타야하는데, 호남선 ktx 열차의 종착점이자 시작점이 바로 용산역이다. 또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에 있다. 전쟁기념관 맞은 편 국방부에 위치해있다. 또한 마용성의 용산. 집값이 비싼 동네이기도 하다.

이번에 용산역사박물관을 다니면서 이촌역, 용산역, 삼각지역 근방이 살기가 좋은 곳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네이버 부동산으로 집값을 찾아봤더니, 아마 여기로 이사오기는 힘들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용산 역사박물관은 큰 기대없이 방문한 장소였다. 그러나 직접 가보니 건물이 너무 예뻤다. 직전에는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이었고, 원래는 용산철도병원이었다고 한다. 병원 건물이 건설된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철도의 중심지 용산에는 철도 관련 건물들이 많았고, 이 병원 건물도 그 중 하나이다. 1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근대건축물이기 때문에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후, 지금의 용산이 되기까지의 다양한 기록과 역사를 담은 박물관이 되었다. 그러나 유물만 많은 박물관이 아니라, 전시에 중점을 둔 박물관이라 전시가 좋았다.

 

 

 

관람시간 : 10:00~18:00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휴관]

해설은 정해진 시간이 없지만, 단체해설 예약의 경우 사이트에서 예약 가능하고, 해설사 분이 계실 때 해설을 요청하면 해설을 듣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갔을 때에는 운이 좋게도 해설사 분이 해설해 주셔서 더욱 유의미한 관람이 되었다.

 

 

아이들의 활동지도 따로 있고, 체험할 곳도 많아서 아이들과 함께 와도 즐거울 거 같다.

 

확실히 병원 건물이었어서 그런지 병원의 형태가 구석구석 보인다. 이 건축물은 곡선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너무 예쁜 병원의 주출입문. 박물관의 주 출입문은 여기가 아니다. 스테인드 글라스에 용산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건물과 100년을 함께했다. 한강에 다리를 놓은 후, 용산을 철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실 용산의 역사를 알아서 어디에 써? 이런 생각도 들어서 가볍게 둘러보자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시를 관람하고 나서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 이후부터 현대까지의 한국의 발전을 함축적으로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용산이구나 싶었다.

 

위 작품은 권민호의 천의 얼굴 용산이라는 작품이다.

한강의 물길따라 포구가 발전한 자리에 증기선이 다니기 시작하고, 증기기차가 다니다가, 한강에 다리가 놓이고 철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부터 미군기지가 들어서고 이 일대는 일본인, 미국인, 돈을 벌러온 한국인, 외국인 들이 한데 섞여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1) 조선시대

조선시대 용산은 안산의 산자락과 한강 사이의 유역이다. 당시 한양 땅이 아니었던 용산은 동성으로부터 10리(4km)에 이르는 성저십리 구역이었다. 특히 물길 따라 포구가 발달하면서 삼남을 오가는 대로가 용산에서 갈라섰고, 각 지역의 세곡이 용산으로 집결되었다.

이때 용산에서 활동하던 상인들을 경강상인이라 하였는데, 종로의 시전상인과 견줄만큼 강력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외국의 증기선이 도입된 이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전시물 근처에 가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영상, 볼거리가 정말 많은 박물관이었다.

 

용산에는 서빙고도 있었다. 경주의 석빙고는 돌로 지어져 아직 남아있지만, 한양의 서빙고, 동빙고는 목조 건축물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당시 얼음은 나라의 것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은 손도 못대는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고, 관리의 감독 하에 얼음을 채취할 수 있었다.

 

 

2) 일제시대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군 전략상 대한제국의 영토를 수용할 수 있었고, 일본은 용산 일대에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여전히 이촌동에 많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영상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면서 한국인의 입대를 장려하는 홍보영상이다.

 

 

원래 효창공원은 왕실의 묘원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사령부는 효창공원을 훼손하고 공원화하였으며, 골프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왕실묘역은 서삼릉으로 강제이전하였다.

해방 후 효창공원은 타향에서 생을 다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송환하여 안장한 애국선열 묘역으로 조성되었다. 백번 김구도 효창공원에 묻혔다. 그 외 이봉창, 유봉길 의사도 안장되었다. 언젠가 모셔와야 할 안중근 의사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1900년 한강철교가 준공되었고, 철도가 한강 이북으로 연장되었다. 주요 간선철도가 용산역을 통과하였다. 물론 한국전쟁때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철도의 교통은 용산이었다.

 

사진 찍을 곳도 많이 있다.

 

용산은 용산의 복구를 도와주는 상인들에게 청과물 시장의 자리를 제공했다. 그래서 용산은 한때 청과물 시장이 유명했었다. 그러다 시장을 가락동으로 이전한 이후 이 자리에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왔다.

 

3) 냉전시대

일본이 패전하였고, 한국인 해방되었다. 약 3년 만에 미군정이 종료되었고 미군들도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 미군의 상시 주둔이 결정되었다.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8군은 서울이 수복되자 용산기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사기지였던 자리에 미군기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이태원 일대에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기지에서 반출된 물건들이 남대문 도깨비 시장으로 유입되었다. 또한 해방촌에는 상경한 지방인들, 성매매 여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또한 용산은 제과산업의 격전지가 되었다. 해방 후 일본인이 운영했던 제과 회사를 한국인이 인수하여 운영했다. 바로 해태였다. 또한 오리온 제과가 생겨났고, 크라운 제과, 롯데제과도 용산에 정착했다. 미군기지의 영향이었다.

 

용산은 언젠가 생길 유라시아 열차의 시작점이다. 한반도에서 중국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유럽까지 연결될 것이다. 만약 생기면 런던까지 12일에 걸쳐 갈 수 있게된다.

 

용산역사박물관이 중앙대 부속 병원이었을 당시, 남영동에서 의사를 찾는 연락이 왔다. 당시 의사 오연상은 남영동에 갔고,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을 발견했다. 당시 경찰에서는 박종철을 턱 치나 억하고 죽었다고 주장하였지만, 오연상 의사는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며 양심선언을 하였다. 이 사실은 향후 민주화 항쟁의 불씨를 키웠다.

 

 

5) 현대

미군이 주둔하면서 용산에 거주하게 된 외국인 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전후에 부족했던 물자뿐 아니라 영화, 음악, 미술 등 미국의 대중문화가 용산에서 한국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많은 가수들이 미군기지에서도 공연을 했고 한국음악은  트로트를 벗어나 다양한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음악이 한국 사회에 퍼져나갔다.

 

삼각지에 있던 화랑에 미군들이 초상화를 주문하면서 삼각지 화랑거리도 형성되었다.

 

박물관 2층에서는 이렇게 휴식하기 좋은 장소도 있어서 쉬면서 전시를 관람하였다.

 

혼자 전시를 관람한 것도 좋았지만, 나중에 아이들과 함께 전시를 관람하면 더더욱 좋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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