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 다녀왔다. 앞서 경교장에 다녀왔기 때문에 더더욱 백범김구 기념관에는 꼭 와보고 싶었다.
아래는 경교장에 다녀왔던 포스팅이다.
2024.06.08 - [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 경교장
경교장
서울 강북 삼성병원 응급실 옆에는 병원 건물과는 이질적인 모습으로 경교장이 있다. 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 09:00~18:00 (월요일, 1월 1일 제외)관람료 : 무료해설 : 평일 11시, 15시 주말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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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은 원래 조선후기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를 비롯한 왕가의 묘를 모신 곳으로 효창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효창공원을 거닐다 보면 일반 공원과는 다르게 벽이나 문이 존재하기도 한다.
본래 묘역이 넓고 송림이 울창했으나 일본 군대가 불법적으로 주둔하면서 이 곳이 훼손되었고, 일제말기 (1945년 3월)에는 묘들을 강제로 서삼릉에 이장하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광복후 김구 선생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삼의사 묘역을 조성하고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나란히 모셨다.
경건한 마음으로 묘역에 올라 묵념하였다.
왼쪽부터 안중근 가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이다.
또한 임시정보 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의 유해를 모셔 임정요인 묘역을 조성하였으며, 김구 선생 서거 후 유해를 안장하였다.
왼쪽부터 조성환, 이동녕, 차리석 선생의 묘역이다.
또한 효창공원 안에는 의열사가 있는데, 이들 8명의 영정이 모셔진 곳이다.
백범김구묘역 맞은편에 백범김구기념관이 있다.
관람시간 : 10:00~18:00 [화요일~일요일]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해설 : 토요일, 일요일 11시, 15시 토요일에는 13:30 해설도 있다.
백범김구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당했다.
들어가자마자 백범김구 조각상이 크게 서있으며, 뒤로는 김구가 독립운동의 자금 모금을 요청했던 태국기가 걸려있다.
다양한 영상과 체험활동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와도 너무 좋은 곳이다.
백범 김구[1876~1949]의 호 백범은 하얀 호랑이가 아니다. 백성의 백, 범인 할 때의 범으로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대한독립을 애타게 바라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세 번째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 김구, 나의 소원 중에서
경교장에서 보았던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도 볼 수 있었다.
청년 김구는 평등한 세상을 위한 동학사상에 이끌렸다. 18세가 되던 해 동학에 입도하고, 1894년 9월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실패하였다. 아래는 해주성 전투의 관한 그림이다.
김구는 해주성 공격 실패 후, 황해도 안태훈 진사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적이었지만 김구는 안태훈의 집에 머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안태훈 진사가 바로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이다. 안태훈 진사의 집에서 안중근 삼형제를 처음 만난 김구는 안중근 의거 후에도 유가족과 인연을 이어갔다.
1984~1985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김구는 청나라를 살피며 조선과 청나라가 힘을 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의병활동을 진행하였다. 김구는 간도 등을 돌아보았는데, 이 경험은 후에 의병부대의 간도 이주와 신민회의 해외 독립운동기지 개척 등에 중요한 정보로 활용되었다.
김구는 일본인을 죽였다는 명목으로 사형수가 되었고, 감옥에서 다양한 학문을 접하면서 견문이 넓혀졌다. 김구가 일본일 죽인 이유는 일본인이 을미사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김구의 사형을 막아주었다.
김구는 항일운동을 시작했고, 항일민족단체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신민회는 안창호가 만든 단체로 국내에서 다양한 구국계몽운동을 펼치는 한편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김구는 옥살이를 한다.
신민회는 독립운동을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전파고 하고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가 이 운동을 뿌리뽑기 위하여 군자금 모금에 대하여 확대, 날조하여 신민회원을 체포하였다. 이때 독립운동가 105인이 잡혀들어갔는데,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김구는 상하이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수립되었다.
앞서 김구는 서대문감옥에 있을 때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김구는 대한민국의 경무국장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를 지키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김구는 내무총장 등 국무위원으로, 그리고 행정수반은 국무령과 주석으로 27년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후 1928년부터 직접 쓴 자서전이다. 상, 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백범일지의 상권은 일제와 싸우다가 죽겠다고 결심하고 고국에 있는 인과 신,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였다. 하권은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치 의열투쟁, 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나 중국 내륙으로 피신생활 후,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해방되기까지의 투쟁역사를 기록하였다. 후에 백범일지가 출간되면서 김구는 자신의 정치, 사회, 민족에 대한 사상을 담은 '나의 소원'도 실었다.
한인애국단의 활동도 자세히 전시되어 있었다. 윤봉길과 김구의 시계도 전시되어 있었다.
2층 추모공간에서는 백범 김구의 묘역도 보인다.
그가 생전에 썼던 글들도 볼 수 있다.
윤봉길 의거에 감동받은 장제스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김구는 1933년 중국국민당 정부 장제스를 만나 한인청년을 군사간부로 양성하면서 한국광복군 준비를 시작했다.
반면 독립운동단체들의 분열이 일어나면서 임시정부가 흔들릴 때도 있었다. 김구는 계속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 좌우합작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미 이때부터 좌와 우의 대립으로 남과 북으로 갈릴 위기는 늘 존재했다.
그 과정에서 김구는 목숨에 대한 위협을 받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지사들은 중국의 승전이 한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고, 항일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나섰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분열된 한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남목청 회의가 열렸다. 김구는 회의장에 난입한 조선혁명당 간부 이운환에게 피격당하여 중상을 입었다. 기적적으로 김구는 생명을 구하였다.
이것은 이운환 개인의 행동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 김구 암살을 시도한 남목청 사건은 일제가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세력 대결을 이용하여 치밀하게 공작 펼친 결과 발생한 사건임이 최근 밝혀졌다.
김구는 194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의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체제로 운영되었다. 중국, 영국, 미국 등 연합군과 연계를 맺으며 대일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래서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동원하여 직접 국내로 진입한다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항복소식이 더 빨랐다.
기념관에서는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구경할 수도 있다.
조국의 독립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 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주독립에 대한 걱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유독립에 대한 일관된 의지는 해방 후 반탁운동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해방 후 환국하였고,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하였으며,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하였다. 김구는 평양을 방문하여 북하느이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서는 9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각각 수립되고 만다.
그리고 1949년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서거하였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판결을 받았으나 15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안두희는 국방부 특명4호로 남은 형을 집행정지 처분받고 육군 소위로 복귀하였다.
확실히 박물관도 큐레이터에 따라 박물관의 성격에 따라 전시 내용이 다르다. 경교장에서는 백범 김구의 암살사건의 배후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것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조사위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비호 하에 이루어진 정권적 차원의 범죄로 국회 본회의로 상정하였다고 한다.
백범김구기념관에 오면서 효창공원에 운동장이 있는지 처음으로 알았다. 묘역근처에 웬 운동장이지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 때 만들어진 운동장이라고 한다.
전시를 마치고 1층에는 AI김구와 대화할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도 있었다.
백범김구의 나의 소원에서 인상깊은 구절이 있어 소개하고 글을 마치려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온화한 기색이 빛나야 한다.
우리 민족의 개개인은 이기적 개인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라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사람이다.
-백범 김구, 나의 소원 중에서
백범 김구의 정신을 마음속으로 새기며 삶에 임하려 한다.
근방에 이봉창역사울림관이 있다. 아래는 그 관련 포스팅이다.
2024.06.20 - [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 이봉창 역사울림관
이봉창 역사울림관
이봉창 의사는 효창공원 근방에서 태어났으며, 효창공원에 안치되어있다. 이봉창 역사울림관은 이쁜 한옥 형태로 지어진 기념관이다. 저기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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