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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by 쫑쌤 2024.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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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를 여기저기 다녀보면 조선시대에 있었던 집터가 전시된 것을 볼 수 있다. 아, 여기는 예전에 집이 있었던 자리구나 라는 느낌이 있을 뿐, 이것이 문화재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런 면에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정말 갈까말까 많이 망설였던 곳이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바로 돌덩이들이 전시된, 그런 집터를 모아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를 만약 방문한다면 꼭 해설을 예약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오늘, 막상 해설과 함께 전시관을 돌아보니, 그냥 커다란 돌의 모임이었을 뿐이었던 집터를 보면서 이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집을 방문하고, 마을에 있는 골목길을 거닐어보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개관 : 화요일~일요일 09:00~18:00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 1일

관람료 : 무료

전시해설 : 11시, 14시, 16시 (40분 정도 소요됨.)

 

아래 사이트에서 해설을 예약할 수도 있고, 현장방문해서 해설을 신청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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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들어서면 목각으로 만들어진 수선총도를 보면서 조선시대의 서울 지도를 볼 수 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보신각 건너편의 정동, 이문동 일대였다. 공평동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육조거리 옆, 시전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일반 서민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생활상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었다.

 

조선시대의 시전과 지금의 종로대로를 비교해 볼 수 있는 홀로그램도 있었다. 큰 대로는 예전과 지금이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1978년부터 이 일대가 재개발 사업을 거치게 되었다. 그런데 2014년도에 이 부근에서 조선시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108동의 건물지와 시대별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래서 재개발사업과 문화재보존의 위한 회의를 거듭 거쳐 문화재 보존을 하되, 건물의 용적률 인센티브를 줘서 서로 상생하는 방향으로 결론짓게 되었다.

 

공평동 일대에서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4개의 시대별 문화층의 모습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조선 초기의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재개발사업으로 지하주차장부터 지하2층 푸드코드, 지상의 사무실로 높은 건물을 세워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지금의 지하 1층 전시관 모습이 되었을까?

우선 문화재 보존을 위해 발굴된 당시를 자세히 기록해 놨다. 그런 다음 임시수장고에 모든 문화재를 옮긴 후, 지하주차장부터 건물을 세웠다. 건물이 완성된 이후 다시 문화재들을 가져와 지하1층에 잘 복원에 놓은 것이다. 문화재를 이루는 돌들 곳곳에 위치에 대한 표시를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복구 과정에서 약간의 위치 수정도 있었다고 한다.

 

 

공평동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지로는 전동 큰 집이 있다. 아래는 1/20크기의 복원건물이다.

 

실제 매장문화재를 이렇다.

 

건물은 초석과 적심석 위에 기둥을 세운 다음에 만들어진다. 따라서 초석 위치와 적심석 위치를 통해 건물과 방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아래는 골목길 ㅁ자 집이다.

 

 

ㅁ자 집 안마당에는 박석과 배수로를 살펴볼 수 있다. 박석은 조선의 궁궐에서도 많이 쓰인다. 박석을 깔아두면 비가 왔을 때 땅이 물을 빨리 흡수하며, 배수로를 통해 물이 빠진다고 한다.

 

진단구라는 것을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진단구란 건물을 지을 때 건물의 안전과 번영을 지신에게 기원하게 위해 땅에 묻는 뚜껑이 있는 항아리이다. 현재까지는 항아리 안에서 별다른 내용물이 확인된 바는 없다.

 

 

공평동 유적에서는 시전이라는 위치상 상공업 관련 물품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특히 화폐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17세기 후반부터 도성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던 상평통보가 주를 이루었다. 상평통보는 조선중기부터 대한제국의 동전이 등장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또한 청나라 화폐와 일본 에도시대 화폐도 출토되었으며, 베트남 화폐도 출토된 것으로 보아 조선의 무역의 범위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장기짝들도 보였다.

 

공평동 유적에서는 명문이 표시된 다수의 그릇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조선 전기에 나라에서 운영하는 관요에서 제작된 것이다. 또한 한글로 이름이 써진 도자기들도 보인다. 당시에는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이웃의 그릇을 빌려 쓰거나 그릇을 빌려주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집과 헷갈리지 않기 위해 그릇 밑에 주인 이름을 써놓는 것이다.

 

이문안길 작은 집 매장문화재 위에는 이렇게 집 모형도 세워져 있다.

 

 

특히 온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아궁이에서 고래독을 지나 온돌방을 따뜻하게 만드는 과정이 보인다. 조선 초기에는 고래독이 1줄이었지만, 조선후기에는 여러 개로 온돌도 발전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공평도시유적진시관은 이렇게 유물을 사이의 골목길도 걸어볼 수 있다. 양 옆에 기와집을 상상하며 걸어보니 재밌었다.

 

지금의 종각역에는 종로타워 빌딩이 있는데, 옛날에는 화신백화점이 있던 자리라 한다. 지금 명동의 신세계 백화점이 일제강점기에는 미쯔비시 백화점이어서 일본인을 위한 백화점이었던 거에 비해, 화신백화점은 한국자본으로 만든 백화점이었다고 한다.

 

전시관 한 켠에 비교적 최근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가 보였다.

사실 이 일대는 1978년도부터 재개발이 시작되었고, 1981년에는 공평 빌딩이 건립되었다. 이 철근콘크리트 구조는 그 때의 것이다. 이 철근은 조선시대의 매장문화재를 파괴한 채 세워져 있었다. 즉, 과거에는 개발을 우선시 한 채 문화재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문화재의 중요성을 느끼고, 함께 상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후에 이루어지는 도시 개발은 이러한 방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있는 센트로폴리스 빌딩 옆에는 태화빌딩이 있다. 이 태화빌딩은 3.1 독립선언을 한 곳이다. 사실 이 태화빌딩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이완용의 소유였는데, 이후에는 요릿집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을사늑약의 무효화 시킨다는 의미로 이 장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등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초석을 통해 건물을 연상시키는 법도 익혔겠다 종로 거리를 다니며 이런 매장문화재가 있는 곳에서 조선시대의 건물을 머릿속으로 그려봐야 겠다. 이번 전시관람은 개발과 문화재의 공존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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