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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관 탐방하기

경교장

by 쫑쌤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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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 삼성병원 응급실 옆에는 병원 건물과는 이질적인 모습으로 경교장이 있다.

 

 

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 09:00~18:00 (월요일, 1월 1일 제외)

관람료 : 무료

해설 : 평일 11시, 15시 주말 11시

 

 

아래의 링크를 통해 예약이 가능하며, 현장접수도 가능하다고 한다.

https://yeyak.seoul.go.kr/web/reservation/selectReservView.do?rsv_svc_id=S24052115232720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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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가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묵었던 곳이다. 임시정부의 청사이자,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 요원이었던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여 김구가 서거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지금 강북삼성병원 안에 경교장이 떡하니 있느냐. 경교장의 역사를 살펴보자.

 

원래 경교장은 최창학이라는 일제시대의 친일행위로 돈을 많이 번 부자의 소유였다. 해방이 되자마자 최창학은 태세를 바꾸어 소유하고 있던 경교장을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 그때부터 경교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및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1949년 김구가 서거하자, 대만의 대사 관저로 사용되기도 하고, 한국전쟁중에는 미국특수부대 및 임시의료진의 주둔지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최창학 일가가 병원에 경교장을 포함한 최창학 일가의 부지를 팔았고, 고려병원이 세워졌다. 후에 고려병원은 지금의 강북삼성병원이 된다. 실제로 경교장의 여기저기에는 병원의 부속건물로 사용된 흔적들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의 경교장 모습으로 복원되었을까?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백범김구선생의 살해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된다. (진상은 결국 밝혀지지 않고, 애매하게 조사는 끝났다.) 그 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과 남북통일운동 등이 재조명 되었다. 1970년대 들어와서부터는 경교장을 역사적 현장으로서 보존되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소유는 강북삼성병원이, 관리는 서울역사박물관이 하기로 하여 경교장이 복원되었고,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경교장 2층에는 김구가 서거하였던 장소에 총탄을 맞은 유리가 재현되어 있다.

 

 

여기는 김구 주석이 평상시 공무를 보거나 접견 장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사무사 : 생각함에 사됨이 없다

개인적인 권세나 이익을 생각치 않고 오직 민족과 통일 위한 삶을 산 김구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김구가 서거 당시 책상 위에 놓여있던 두루마리 중 하나로, 가장자리에 혈흔이 남아있다.

 

경교장은 김구의 빈소로 사용되었고, 김구는 대한민국 최초로 국민장을 치루었다. 이후 효창공원에 안치되었다.

 

 

경교장은 겉은 서양식 건물이지만, 내부는 일본식 복도에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건물이다.

 

아래는 2층 응접실(서재)이다.

 

 

이러한 응접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후 김구 주석과 국내 정당대표들과의 회담 및 국무위원회(국무회의)가 개최되었던 장소이다.

 

1층의 귀빈식당은 임시정부의 공식만찬이 실시된 곳이다.

 

 

그 당시 취재진의 기사도 전시되어 있다.

 

김구의 큰아들 김인의 부인이었던 안미생은 안중근의 조카딸이기도 했다. 영어를 잘하여 외국인과의 회담에서 통역을 하기도 하였고, 반탁 및 여성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층 응접실의 모습.

 

1945년 12월 3일, 중국에서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이곳에서 국무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논의 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남과 북의 역량을 단결하여 자주 통일의 구체안을 완성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는 지속적으로 개최되었다.

 

경교장의 지하공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에는 보일러실과 부엌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독립선언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으로부터 환국하였다. 이 사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충칭에서 환국하기전 찍은 사진이다. 정부로서 승인을 받지 못해서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입국하였다.

 

이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새국가 건설의 원칙을 14개조로 정리하여 밝힌 성명서가 바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한국기념 서명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임시정부는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7년 신탁통치안이 폐기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상정되자, 김구는 남북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김국는 1948년 북한과의 남북지도자협상을 제안하였고, 실제로 회담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8년 8월 15일에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9월 9일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기 수립되었다. 이후 김구는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중심으로 한 평화통일운동을 추구했다. 그러나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수립을 선포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으며 국호, 연호, 국기, 애국가 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김구의 백범일지 초판본도 볼 수 있다. 백범일지는 김구의 자서전이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만약 김구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우리나라는 통일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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