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이미지, 경복궁! 대표 장소답게 봄은 맞아 한국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들이 경복궁을 찾아왔다.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고 한국을 즐기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관람시간 : 09 : 00 ~ 18:00 (매주 화요일은 정기휴일)
관람요금 : 3000원 (한복착용시 무료)
해설 : 매 시 정각과 30분마다 각 종 언어로 해설이 있음.
경복궁은 1395년에 태조가 창건한 조선왕조의 법궁(왕이 거처하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이다. 정도전이 지은 경복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풍수지리 상 배산임수를 위해 뒤에는 북악산이, 앞에는 작게는 청계천, 크게는 한강이 자리해 있다.
안타깝게도 선조 25년(1592) 때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270여년 간 복구도지 못하다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현재의 경복궁은 그 시기의 30%정도밖에 복구되지 않았을 정도로 경복궁은 엄청난 규모를 가진 궁궐이었다. 지금의 청와대 부지도 경복궁 후원의 일부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고, 광화문 뒤쪽으로는 심지어 조선총독부 건물이 세워져 1995년까지 사용되기도 하였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경복궁의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다.
대문인 광화문을 건너 흥례문을 들어서면 영제교를 만날 수 있다. 본래 북악산 산자락부터 내려온 물이 청계천까지 흘러야 하지만 아직 수로가 복구되지 않았다. 4마리의 천록이 외부로부터의 잡귀를 잡아 궁을 보호하고 있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의 정식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어좌에는 일월오봉도가 그려 있고, 천장으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왕권을 상징한다.
궁은 목조건물이다보니, 언제가 화재를 걱정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소화기 역할을 하는 '드므'가 설치되어 있다. 워낙 관광객들이 쓰레기통으로 착각하여 뚜껑을 씌워놓았지만 본래 화재가 났을 때를 대비하여 물을 가득 채워놓는다고 한다.
궁궐의 처마 밑에는 새로부터 단청을 보호하기 위해 그물인 '부시'를 설치하기도 했고, 다섯날의 창을 가진 '오지창'을 설치하기도 했다. 오며가며 당연히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현대의 장치라 생각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부터 해왔다고 하며 다른 나라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기술이라고 한다.
경회루는 연회를 하던 장소였다. 화강암의 기둥이 밖에는 네모모양이고, 안쪽은 둥근 모양으로 하늘을 원이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의 세계관을 살펴볼 수 있다. 경회루의 오른쪽에는 경회루를 입장하는 문이 있다. 이때 길이 왕이 다니는 길 어도, 신하가 다니는 길 신도로 나뉘어진 것처럼 왕이 입장하는 문, 세자가 입장하는 문, 신하가 입장하는 문 세가지로 나뉘고, 높이차이가 나는 것도 살펴볼 수 있다.
궁궐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잡상'이다. 지붕에 올려진 장식기와로 적게는 5개, 많게는 11개까지 올려져 있다. 경복궁 경회루가 특히 11개로 제일 많다. 우리나라의 오랜 선입견 중 홀수가 양의 숫자이며 짝수는 음의 숫자여서 홀수개의 잡상이 올려져 있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실이다. 1917년 창덕궁의 대조전이 소실되자 대조전 중건을 위해 교태전이 옮겨졌다. 지금 경복궁의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자경전은 대비마마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화려한 벽면과 굴뚝의 조각들은 십장생 무늬를 통해 불로장생을 기원하고 있다. 이는 실용적인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조형미가 빼어나 조선 시대 궁궐 굴뚝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복궁의 북쪽 후원 영역에는 향원정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건청궁이 있었는데,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나고 고종과 명성황후가 기거하였던 곳이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지 8년 뒤인 1887년, 고종은 에디슨의 백열전구를 경복궁에 설치했다. 이 때 고종은 직접 에디슨에게 편지를 보내 경복궁에 전구를 설치해 달라 했고, 향원정과 건청궁에 최초로 전등을 사용한 곳이다.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왕후가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슬픈 장소이기도 하다.